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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5月 韓·日歷史文化探險隊

釜山近代歴史館 / 梵魚寺 / 佐川駅

釜山近代歴史館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이라 칭함) 부산지점 건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동척은 1910(명치 43년)에 마산출장소를 설치하여, 1919년(대정9년) 마산지점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대정10년) 부산 대청동(당시 大廳町)으로 이전하여 1929년(소화 4년) 지금의 대청동에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건축은 근대합리주의 양식이며, 외벽기초에는 대리석을 벽면에 두르고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아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는 문양을 넣었다. 실내는 전형적인 은행 건물형태로 대형기둥을 세우고 문양을 넣어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창문은 서구 건축의 대표적인 형태로 되어 있고, 옥상을 철근콘크리트로 마무리하였다. 동척 부산지점은 일제가 우리나라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토지수탈의 선봉역할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를 강제로 매수.착취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토지조사를 한다는 미명아래 부산.경남지역의 토지 및 경제 침탈을 자행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대표기관의 건물로 사용되어 왔다.

8.15광복 이후 이 건물은 미군이 진주하여 주둔지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한미간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1950년~1953년 까지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 1982년 3월 반미학생운동으로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던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현장이다.

1984년 1월 부산문화원 2층에 영사관을 개설하여 부산, 대구, 경남, 경북, 제주도의 영사업무를 담당하여 오다가 1996년 미국대사관으로 통합 운영하게 되면서 폐쇄되었다. 미문화원으로 50년 3개월 동안 무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9년 4월 30일 우리정부에 반환하였다. 6월 10일 재정경제부와 협의를 통하여 시유지와 교환으로 부산광역시에 이관되었다.

부산광역시에는 건물의 역사성과 주변환경을 고려 역사교육장으로 활용을 위한 "부산근대역사관"을 조성하여 부산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현장학습의 역사교육장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부산광역시에는 근대 건축물의 보존을 위하여 2001년 5월 16일 부산광역시 지방기념물 제49호로 지정하였다.

상설전시 안내

1층

.영상실, 근대자료실, 정보검색코너,휴게공간

2층

.부산의 근대개항(부산의 개항,일본인의 이주와 전관거류지 설치,조선정부와 조선상인의 활동)
.일제의 부산 수탈(일제의 지배기구,무역과 상업,농업,공업, 수산업과 금융업, 인력수탈,물자수탈)
.근대도시 부산(시가지 계획과 매축,부산항 변천도, 항만과 철도,1938년 부산시가지 모형, 근대시설, 동래의 변화)

3층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의 설립과 분포, 농장경영, 이주사업)

.한미관계(19세기 한미관계의 출발,미군정기의 정치와 행정,미군정기의 사회와 경제,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미국의 한국원조, 부산 미문화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반환운동)

.부산의 비전(부산행정구역 변천,항만물류도시,정보영상도시,문화관광도시,부산! 오늘과 내일)

梵魚寺

 

소재지 : 부산 금정구 청룡동(靑龍洞) 546번지 금정산(金井山)에 있는 절.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禪刹大本山 金井山 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이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서 영남 불교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범어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인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義湘) 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창건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서깊은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범어사는 오랜 역사와 함께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고, 삼층석탑(보물 제250호), 대웅전(보물 제434호), 일주문(지방유형문화재 제2호), 당간지주(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 석등(지방유형문화재 제16호)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명찰이다.

대웅전(大雄殿) 앞에 있는 3구의 20단 석계중에서 중앙(가운데)구 20단 석계는 원래 부터 있었던 것이고, 좌구 20단 석계와 우구 20단 석계는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일제시대의 일본인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다. 육안으로도 중앙(가운데)구와는 재질이 다름을 확인 할 수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3구의 20단 석계를 올라서 이르는 상단구역에 위치하며 사찰안에서 가장 중심인 주불전이다. 창사 때부터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6년(1614)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묘전 화상이 현감(玄鑑), 해민(海敏) 스님들과 함께 중창했던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며 다포식(多包式) 가구의 양식적인 특성과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어서 목조 건축물의 연구에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웅전(大雄殿) 바로 앞에 있는 석등 5개가 1렬로 배치되어 있고, 우리나라 사찰의 석등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석등이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하여 설치된 일본식 석등이다.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발포한 사찰령에 반대하는 임제종 운동과 이후 항일민족 불교의 정신적 기반으로 계승되었다. 임제종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이후 당시 원종(圓宗)의 종정 이회광(李晦光) 등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불교를 조동종에 팔아 넘긴 매종 행위를 비판한 운동이다. 당시 일제는 조선 사찰령의 반포를 통해 본사(本寺) 중심제의 불교 운영과 그 주지직은 총독부의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을 요구 하였다. 그 결과 세속을 계도해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세속을 향해 머리를 굽히는, 다시 말하면 가치가 전도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와 아울러 일제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사찰이 점유하고 있던 토지에 눈을 돌려 그것을 빼앗기 위해서 사찰에 거주하던 승려들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는 한편 나아가 사원의 운영을 장악하고 교단의 종권(宗權)까지를 넘보게 되었다.

종루는 2층 누각에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규모로 되어 있으며,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사법물(四法物)을 갖추고 있다. 원래는 심검당 오른쪽 전방, 3층 석탑 맞은편 중정에 있었다. 당시의 건물은 숙종 25년(1699)에 명학 스님이 중창하였다고 전하는데 일제시대 초기에 일본인에 의하여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옮겨 세웠다.건축 양식이 미륵전과 흡사하여 1889년경에 크게 손질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막돌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2층 누마루를 깔고 다시 2층 기둥을 세워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원래는 1층 누하주를 전부 열었으나 지금은 간벽을 막아서 기념품 판매점을 꾸몄다. 공포는 미륵전과 흡사한데 창방 뺄목을 돌출시켜서 양봉 형상으로 주두를 감싸고 살미는 끝을 만곡시켜서 연꽃을 초각하였다. 다시 행공 첨자와 제2첨자를 첩놓아서 봉두 형상을 초각한 보뺄목과 장혀 및 도리와 결구하고 내부는 한 몸처럼 보아지를 틀었다. 한편 최근에 승가대학(僧伽大學) 일곽에 세운 또 하나의 종루가 있다. 정면, 측면 세 칸의 누각형 건물로서 1층 누하주와 바닥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석등은 신라의 의상대사가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오나 옥개석과 화사석, 상대석, 간주석, 하대석이 모두 팔각형을 기본으로 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양식에 속하는 작품이다. 대체로 석등은 금당이나 탑 앞에 놓이는데, 이 석등도 원래는 용화전 앞에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지금 석등이 있는 자리에 있던 종루를 옮기고, 그 자리에 석등을 옮긴 것이다. 석등을 금당이나 탑 앞에 두는 것은 사람이 운명하는 순간에 등을 밝히면 상종명을 얻고, 죽은 자를 위하여 탑요제불 앞에 등을 밝히면 삼심삼천에 태어나며 다섯가지 청정을 얻는다는 것 등이 지혜, 해탈, 자비, 선행, 청정, 재생 등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석등은 금당이나 탑과 함께 사찰의 중심부에 놓이며 정성을 모아 조성되었던 것이다. 이 석등은 하대석의 복련이나 상대석의 양련이 모두 겹꽃으로 꽃잎이 8잎인데, 꽃잎이 단엽인 것이 쌍엽인 불국사 석등과 다를 뿐, 불국사 석등과 같은 형식에 속한다.

이 석등은 후대에 보완된 간주석이 너무 빈약하여 전체적 조화를 잃었고, 상륜부의 부재들이 없어졌으며, 옥개석 위에 얹힌 노반은 제 짝이 아니다.

성보박물관 앞에 세워진 7층석탑일제시대에 세워진 석탑으로 인도스님이 가져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다하지만 알 길이 없다. 높다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탑으로 신라탑 형식을 모방하였으며 그 주위로 돌난간을 두른 뒤 모서리에 호법(護法)을 의미하는 석인상(石人像)을 세워 놓았다. 원래 이 7층석탑은 대웅전(大雄殿) 옆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위치인 성보박물관 앞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 7층 석탑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중국인 석탑조각가를 고용하여 지금의 대웅전 옆에 세웠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넣어 보관하거나 사리가 없어면 불경이나 불상을 넣었다. 스님의 사리는 부도을 만들어서 보관하였다. 그런데 이 7층석탑에는 석탑에 인도 스님의 사리를 넣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미륵전 앞에 있는 3층석탑은 높이가 4미터에 이르는 3층탑으로서 보물 제250호로 지정되었으며, 상층 기단이 높게 마련된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탑으로 9세기의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상-하층 기단의 면석에는 탱주(撑柱)대신 안상(眼象)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것은 9세기 탑에서 보이는 상징적인 요소라 할 수 있겠다. 각 층의 옥개석(屋蓋石)과 옥신(屋身)은 각각 한돌로 이루어졌는데, 옥개석은 받침이 4단으로 얇아졌고 반전(反轉)을 강조하여 경쾌하지만 2층 이상의 탑신 높이나 폭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고준하기 때문에 안정감이 결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소실되어 버리고 지금은 노반과 보주만이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보주는 후대에 만든 것이고, 노반(露盤) 또한 거꾸로 놓여져 있다. 이 3층석탑은 일제시대에 수리를 할 때 기단 밑을 석단으로 받쳐 놓았기 때문에 높이 솟아 있는 것처럼 보이며 탑을 둘러싼 난간도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재의 범어사 가람배치양식이 우리나라 전통적인 사찰의 가람배치양식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의하여 가람의 배치양식이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근대 사회를 지향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불교계도 특히 교육부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범어사는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설립하여 주로 무산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운영하였다. 이는 이보담, 홍월초 등이 선진 교육 제도 도입에 크게 자극을 받아 1906년에 만든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지방 기초학교였다. 범어사는 이어 1917년에는 지방 학림을 설립하기에 이르렀으며 1922년에 통도사ㆍ송광사ㆍ석왕사 등 3개 사찰과 연합하여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고 경영을 시도할 정도로 교육 사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편 범어사는 많은 포교소(당)를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포교소는 종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교육 계몽적인 기능까지 수반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동래에 설치한 포교당이 1921년부터 경영한 '싯달 야학교'를 들수 있다. 이러한 야학 운영은 동래 지역의 무산층 아동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범어사에서 설치한 포교소는 부산ㆍ경남 일원에만 한정되지 않고 서울과 대구 등지로까지 확산되었다. 서울의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은 1921년에 선학원을 결성할 때 이용한 곳으로 그 명칭 자체를 선학원으로 바꾸었다가 선학원을 안국동으로 이전한 뒤인 1926년 6월에 다시 범어사 포교당으로 그 명칭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범어사가 서울에까지 포교소를 설치한 것은 당시 범어사의 경제력이 그만큼 컸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범어사가 중심이 된 선풍 진작 운동을 사상적인 기반으로 하는 임제종 운동이 당시 불교계에 확산되어 갔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범어사가 1910년부터 1920년대에 근대 교육 운동에 많은 힘을 기울였던 사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러한 교육을 통해 배출된 청년 승려들과 빈한한 농민의 자제들이 당시 민족 운동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범어사가 3ㆍ1 운동 당시 동래 지역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수탈의 극한 상황에서 폭발한 3ㆍ1 운동에는 불교계에서도 각 사찰을 중심으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며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렇게 당시의 불교계가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원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불교를 지향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일련의 과정에서 배출된 청년 승려들의 역할이 주된 동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래 지역은 3ㆍ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는 분위기에서 타지역에 비해 서울에 이어 비교적 빠른 시기에 만세 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범어사가 서울에 포교당을 세운다든가 불교 진흥 운동과 근대 교육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범어사 승려들이 서울의 운동을 주도한 핵심부로 일부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동래 지역 운동의 주축은 범어사의 청년 승려들과 범어사가 설립한 학교의 교사 및 졸업생, 학생들이다. 물론 운동에 참여한 일반 민중들의 역할을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범어사가 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범어사의 선진적인 만세 운동은 인근 경남 지역의 각 사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범어사는 동래 지역의 3ㆍ1 운동뿐만 아니라 이후 동래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러 사회 운동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계몽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곧 민족 모순을 극복하려는 운동까지도 포괄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제의 질곡기를 거치고 해방을 맞이한 뒤 범어사를 이끌어갔던 분으로 동산(東山, 1890∼1965) 스님을 들 수 있다. 동산 스님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 스님을 은사로 하여 불문에 들었다. 용성 스님은 3ㆍ1 운동 당시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했던 인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 불교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경허 스님에 이어 선사상을 크게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펼쳤던 분이다. 동산 스님은 특히 1950년대의 소위 정화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는 근대 불교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구축한 범어사의 사상적인 맥락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정화 운동은 제1공화국 위정자들의 정치적인 의도가 게재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불교계가 안고 있던 당면 과제를 실천적으로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佐川駅

위치 :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 119번지 (전화 : 727-0129)

부산광역시 기장군 좌천읍 좌천역의 승강 및 하치장규모는 여객승강장이 1개 화물홈 1개, 여객열차는 32회 정차, 2회 통과이다. 수송현황은 승차인원 44명, 하강차인원 359명, 화물발송은 0.14t, 화물도착은 24t이다.

1935.12.16 일제시대에 운전 취급역으로 개설하여 부산과 울산을 연결하는 중간에 위치하는 역으로 현재에 있는 역사는 일제시대에 건축물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 사진은 좌천역의 앞쪽에서 바라본 전경.

좌천역의 뒤면에서 바라본 전경.

좌천역의 앞에 위치한 일제시대 좌천역 앞에 위치한 좌천 파출소 전경.






(사)부산국제친선협회 / (社)釜山国際親善協会
TEL 051-853-3551 FAX 051-853-3552 E-mail : bifs@bif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