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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7月 韓·日歷史文化探險隊

가덕도 대항(大項) / 가덕도 외양포(外洋浦) / 가덕도 등대(燈臺)

가덕도(加德島) 대항(大項)

2003년 7월 16일 06 : 30분에 한일역사문화탐험대는 가덕도 대항,외양포,등대를 향하여 출발을 하였습니다. 참가자는 (사)부산국제친선협회 사무국장 이상점, 재부산일본국총영사관 전문조사원 키쿠찌 유지, 정인웨딩 실장 강철두가 참여 하였습니다. 가덕도(加德島)의 대항 세바지에는 일제시대 때에는 해안에 동굴을 파서 진지와 관측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외양포에는 포대진지를 만들었고, 포대사령부가 주둔한 지역이며, 일본의 건축물이 많이 산재해 있다. 외양포에는 일본의 시골을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느낌이 느껴진다.

한적한 가덕도 대항 마을의 등대와 전경, 이 곳은 러일전쟁(1905년 5월 27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주둔한 지역으로 가덕도수비대가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덕도 대항 마을의 오른쪽에 있는 곳으로 러일전쟁(1905년 5월 27일)을 준비하고, 일제에 의하여 암반에 인공적으로 굴착하여 만든 동굴로 가덕도수비대가 대항마을과 진해만에출입하는 선박을 감시하는 초소로 활용하던 곳입니다.

가덕도 대항마을의 한적한 포구의 전경

가덕도 대항마을에서 외양포로 가는 야산의 전경, 가덕도 대항마을 쪽에는 주로 가덕도수비대가 주둔하고, 외양포마을은 주로 포부대사령부가 준둔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한적한 대항마을의 포구의 전경

가덕도 대항마을 포구에서 대항마을 세바지로 가는 야산의 모습, 일본군의 가덕도수비대가 주로 주둔한 지역으로 이 곳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거주하던 막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진해만요새제1지대표(鎭海灣要塞第一地帶標)" 라고 새겨진 당시의 표석을 민가의 지줏대로 사용하고 있다.

가덕도 대항마을 세바지에 있는 석물로 지금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육군사용지(陸軍使用地)" 라는 일본군의 석물표식, 이 곳 가덕도 대항마을과 외양포 마을은 주로 일본군의 육군인 가덕도수비대와 포부대사령부가 주둔한 지역이며, 거제도 장문포 지역과 진해 지역은 주로 일본군 해군이 주둔한 지역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가덕도 대항마을 세바지에 있는 구조물로 일본군 가덕도수비대가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러일전쟁(1905년 5월 27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축조한 곳으로 보이며, 러일전쟁이후에도 계속 주둔하면서 태평양전쟁 때에도 주둔하였다고 합니다. 앞쪽에는 3개의 출구, 뒤쪽에는 2개의 출구가 완성 돼 있다. 뒤쪽 출구 1개는 공사도중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공사가 중단 됐다고 하는데, 강원도 태백에 온 광부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강원도 태백에서 온 광부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보았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에 패한 뒤 강원도 태백에서 온 광부들이 살아서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앞의 입구에서 뒤쪽으로 향하여 본 전경, (약, 넓이 2미터 50, 높이 1미터 90), 동굴안에는 창고의 형태를 갖춘 저장 시설도 있다. 동굴의 끝부분에서 5m지점에 음식물과 탄약 등을 보관하는 시설이 있다.

입구에 조금(약, 10미터)들어가면 좌, 우로 세갈래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경.

세갈래의 굴의 밖에서 본 전경, 일본군 육군인 가덕도수비대가 출입하는 선박 또는 연합군 비행기를감시하기 위해서 만던 감시초소, 밖에서 안으로 가면서 점점 작아져서 겨우 한사람의 정도(가로 약50cm, 세로 약50cm)의 몸이 들어 갈 정도의 크기이다.

가덕고 대항마을에서 외양포 마을로 넘어가는 산에 있는 계단으로 일본군에 의하여 축조된것으로 지금은 개발로 인하여 인위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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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加德島) 외양포(外洋浦)

가덕도 외양포 마을의 전경. 러일전쟁 당시인 일본군 해군은 1905년 2월 22일 거제도 장문포에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의 육군인 가덕도포대사령부는서기 1905년 4월 21일 편성하여, 1905년 5월 7일에 외양포에 상륙을 하였다. 이전에 이미 가덕도수비대와 포대사령부의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하여 많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가덕도 포대사령부(본군)가 1905년 5월 7일에 가덕도 외양포에(外洋浦)에 상륙을 하였다.1905년 5월 27일 러시아 해군 사령관"로제스트 벤스키"가 보유한 함선37척과 병사 3,000명을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군 해군과 육군의 상당수가 경남 거제, 경남 진해, 부산 가덕도에 주둔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군 육군의 포병 사령부의 헌병대가 사용하던 건물. 외양포 마을의 입구에 위치한다.

포병사령부의 헌병대가 사용하던 화장실.

한국의 축조술은 퇴매식(品자형)으로 외양포마을의 전체가 퇴매식(品자형)으로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 외양포 마을 입구에서 현재에 포대사령부 표시석이 있는 곳에 까지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개울과 하수구가 한국의 축조술인 퇴매식(品자형)으로 되어 있다. 산 아래에서 부터 정상에 까지 갈지(之)자 형태로 수키로미터에 걸쳐 이어져 있다. 외양포 마을에서 대항마을로 가는 길의 전부가 퇴매식(品자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수의 한국인의 축조 기술자와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당시의 일본의 축조술은 견치식(개 이빨식)이다.

헌병대 건물의 뒤면에서 본 전경. 이 집에 거주하는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지하에 쇠 창살로 (감옥시설)로 된 시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무단으로 이탈하는 자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이 헌병대에서 취재하고 감옥시설에 가두어던 것으로 주측된다.

외양포 마을 입구에서 본 마을의 전경. 해방이후 소나무가 있는 곳에 말 3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미군이 들어 오면서 말 3마리도 가져갔다고 한다. 이 곳에 있는 소나무도 일본군이 심은 것으로 연합군의 비행기 정찰을 피하고, 위장하기 위하여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양포 마을 입구(포구)에서 정방향으로 20m 정도 올라가면 있는 건축물, 해방이후에 이 건물 앞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포문(길이 약 5m)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미군이 가져갔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포대사령부의 사무실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축물은 당시 일본군의 막사로 사용되던 곳이며, 앞의 밭은 당시 일본군이 훈련하던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건축물은 당시 일본군의 막사로 사용되던 곳이며, 앞의 밭은 당시 일본군이 훈련하던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건축물은 일본군의 관사로 사용되던 곳으로 추측된다.

일본군 육군의 포병사령부 병사들이 사용하던 화장실, 정면에서 우측에 위치함

일본군 육군의 포병사령부 병사들이 사용하던 화장실, 정면에서 좌측에 위치함

위 건물에 가덕도 포대사령부의 제일 높은 일본군의 관사로 사용하던 곳.

 

위 사진이 보이는 곳에 병원 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

일본군 육군의 가덕도수비대가 사용하던 무기고로 추정되는 곳.

위 사진의 앞에 병사들의 막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

 

마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외양포 마을에는 9개의 우물이 있었고, 이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우물.

 

외양포 마을에는 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우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외양포 마을에 주둔한 가덕도수비대와 포병사령부의 인원은 일천명은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외양포 마을을 출입하는 일본군의 선박이나 함선에도 많은 량의 식수를 공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축물은 일본군의 관사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추측된다.

위 사진의 정면에 보이는 푸른색 뒤에 콘크리트 시설에 흙으로 덮은 포대진지가 있는 곳.

이 건축물의 용도를 알기 어렵다.

포대진지가 있는 방향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있는 건축물로 사용 용도는 알수가 없다.

대항마을로 연결되는 산의 중턱에 위한 우물

 

일본군의 간부들의 숙소로 이용한 곳으로 추측되는 건축물

이 곳은 외양포 마을의 제일 위쪽에 위치하는 곳으로 대항마을을 연결하는 곳으로 일본군의 아주 중요한 시설물이 있어던 것으로 추측되며,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 폭파 시킨 곳이다.

위 사진의 뒤 부분에 세워진 전신주가 보이는 방향으로 대항마을로 연결하는 길이 있다.

원형이 잘 보존 된 우물의 모양, 이 곳은 외양포 마을 입구(포구)에서 정방향으로 약 500m 정도 오르면 포대진지가 위치한다. 포대진지가 있는 방향으로 오르면 오른쪽 부분에 위치한다. 이 곳은 일반적인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대진지가 있던 입구에 있는 것으로 화장실로 추정된다.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고 쓰인 석물.

(앞면)
사령부발상지지. 명치삼십팔년사월 이십일일 편성하령. 동년오월칠일외양포 상륙

(司令部發祥之地. 明治三十八年 四月 二十一日 編成下令. 同年 五月七日外洋浦 上陸)

일본군의 육군인 가덕도 포대사령부를 서기 1905년 4월 21일 편성하여, 1905년 5월 7일에 외양포에 상륙을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이전에 이미 가덕도수비대와 포대사령부의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하여 많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가덕도 포대사령부(본군)가 1905년 5월 7일에 가덕도 외양포에(外洋浦)에 상륙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뒤면)
소화12년 육월 건지. (昭和十二年 六月 建之)

이 비석을 건립한 것은 서기 1936년 6월에 가덕도 포대사령부의 상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추측된다.

외양포마을 입구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향토사학자가 이 곳으로 옮겨서 설치를 하였다고 한다. 이 비석으로 보아 일제시대 1935년~1938년 사이에 많은 비석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러일전쟁의 승리와 일본의 조선식민지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많은 곳에 이런 조형물과 석비을 설치한 것으로 추측된다.

포병들이 휴식하며 대기하는 곳으로 외양포 마을에는 2개가 있어며, 포탄을 저장하던 곳으로 추측된다. 연합군의 비행기 폭격에 대비하여 상당히 견고한 형태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비행기 폭격에 대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합군의 비행기 폭격에 대비하여 하중을 최소화 하기 위한 형태로 구조물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포병들과 포탄을 저장하던 시설물로 다른 시설물로 쉽게 이동하기 위하여 사진의 제일 오른쪽 끝에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있으며, 사진의 오른쪽에 돌출된 콘크리트 시설물의 용도는 알수가 없다.

여러 곳이 대피할 수있는 굴을 만들어 비상시에 대피할 수 있게 서로 연결 되어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이 시설물은 연합군의 비행기 폭격에 대비하여 콘크리트 벽 위에 흙을 덮어 위장한 일본군포대 벙크(bunker), 옆에 가로로 보이는 시설물은 폭격에 의한 진동과 소음을 최소화 하기 위하여 만든 시설물이다.

이 옆면의 시설은 포탄을 발사하면 소음을 적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방화벽으로 추정된다.

포병들이 대포을 발사하면 위 사진에서 보는 산의 정상을 넘어 바다로 날아 갔다고 한다. 산 정상에는 바다를 감시 하면서 포대에 방향을 알려 주어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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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도(加德島) 등대(燈臺)

위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항동 산13-2번지(N34˚ 59.2´ E128˚ 49.9´)

초점등일 : 1909년 12월

1909년 12월에 초점등한 가덕도 등대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하여 축조된것으로 가덕도 섬 남쪽 맨 끝의 동두말 이란 곳에 위치하고 있다.등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군 작전지역 내 있어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미리 연락하면 등대 견학은 가능하다.

외양포 입구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오르면 포대사령부의 관측소로 추정되는 산의 정상을 지나서 해안쪽으로 계속 돌아가면 옛날의 포구로서 두통포가 있었다고 한다. 외양포에서 남쪽의 남산자락을 돌아가면 가덕도 최남단에 가덕도등대가 있고 해군진해가덕도 파견대가 주둔하며, 동두말곶에 이르면 북쪽에 망뫼산이 있다. 천수말에서 대항리까지 이어지는 해안일대 앞쪽으로 병산열도와 거제도, 진해만으로 이어 지는 수로의 길목으로서 일제시의 작전포진지와 땅굴흔적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대항마을 남쪽 1㎞ 지점에 있는 수리산 먼뎅이는 일제때 일본해군의 관측소가 있었다하여 관측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세바지에는 동남간을 바라보는 지세에 따라 여러 곳에 굴이 배치되어 있다. 1차대전시 접진하는 사격 포대진지였다. 외양포 해안 돌자갈밭에 는 일제때 사용했던 화약 파편이 지금도 발견되고 있으며 땅굴과 포대등의 원형대로 남아 있는데 외양포는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대항으로 쫓아내고 육군 포대진지로 사용했던 곳으로 이곳에는 일본 헌병들이 마셨다는 헌병샘이 있다. 샘터로서 이름난 곳으로 대항초등학교 뒤 수왕산 머리에 맷새미 우물이 있는데 옛날에는 물이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물이 넘폈는데 지금은 조그마한 옹달샘으로 남아있다.

대항에는 바위섬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남서쪽 3㎞ 지점에 숭어잡이로 유명한 내동섬이 있고 서쪽 3㎞ 떨어진 곳에 달팽이처럼 생긴 바위섬 달빙이섬이 있고 등대앞에는 해녀라는 돌샘이 있으며 대항 서쪽 2㎞ 지점에 모양이 코같이 생긴 코바위섬과 남서쪽 4㎞ 지점에 농 처럼 생긴 농바위섬이 있다. 동쪽으로 아이의 머리처럼 생겨 전설이 깃든 애기방구가 있어 동백나무군락지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 5㎞ 지점에 모양이 훌쩍하고 면이 넓적한 탕건처럼 생긴 탕건바위가 있 다. 대항은 가덕도의 최남단 해안으로서 외양포앞의 바닷가 자갈이 많은 자갈(자갈치)개와, 세 바지(등반이)개가 감성 돔 낚시터로 유명하며 동백단지인 동두말의 서북쪽 두퉁개, 그리고 동쪽에는 오지양개가 있는데 이 갯가에는 오지양어장을 비롯하여 앞쪽에동백섬, 어운포, 수 무조등의 어장이 있다. 이곳 어장에서는 2월∼5월 한철 숭어잡이가 주된 업종인데 겨울에는 명물인 가덕대구가 많이 잡혔지만 지금은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 대항3경으로 해안의 기암절별과외양포, 가덕등대를 들고 있다.

외항에는 대항초등학교와 대항어선 출입통제소가 있고 가덕도 등대가 있다. 외양포마을 입구에 큰 포구나무가당산옆에 있었는데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베어버리자 밤마다 일본군 1명씩 이 죽자 대항의 노인 한분이 일본군들에 포구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 병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그들이 제사를 올린 후로는 별 다른 일이 없어져 이 자리에 일본군 포대진지를 만들었다고 하며 이곳에는 일본인이 상륙했던 기념비가 밭에 버려져있는 것을 향토사학자가 현재의 포대진지 안에 설치 했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등대의 모양은 고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미를 지니고 있어(사진참조) 해양수산부에서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는 등대로 선정되어 있다. 가덕도 등대는 한국 최대 항만인 부산항에 걸맞은 최고(最高)의 등대가 세워졌다.부산신항만 입구인 부산시 강서구 천가동 대항마을의 가덕도등대가 국내 최고높이로 새로 세워져다. 새 가덕도등대는 작년 5월부터 9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국내 최고인 40.5m 높이로 지어졌으며 대양으로 진출하는 선박을 형상화해 동북아 중추항만으로 도약할 부산신항만의 역동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가덕도등대2장 사진제공자-부산광역시 문화예술과 문화재연구관 박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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