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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6月 韓·日歷史文化探險隊

경북대학교 의대 본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중구 소재) 건물 중 2동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 고시되었다.
1월 28일자 문화재청 고시 2003-3호 (관보 제15310호 게재)로 지정된 건물은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 및 '구 도립대구병원' 등 2동이다.


舊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대구지역 의료인 양성을 위해 지어진 건물로 1933년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개교되었으며 한국 근대의학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서,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또한 전체와 세부구성이 치밀하며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수준높은 건물이므로 근대건축으로서의 건축사적으로 가치 뿐만 아니라 교육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舊 도립대구병원(現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관)은 1928년 도립 대구 의원으로 건립되었으며 한국 근대병원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우측 익사는 철거되고 정면 좌측에는 증축된 부분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어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건물은 구 도립대구병원(사적 제443호, 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병원 본관)건물과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남향하여 동서로 길게 배치된 붉은 벽돌 조적조 3층 건물로 정면 중앙부에는 4층으로 된 사각탑(Turret)을 두고 옥상에는 옥탑을 설치하였다. 평면은 ‘산(山)’자 모양으로 중복도(中複道)식이며, 현관 포치(Porch)를 중심으로 좌우대칭형이다.

건물의 외관 구성에 나타난 특징은 정면 중앙부 돌출 유리벽의 곡면처리 및 창 사잇벽과 옥상 파라팻부의 수평돌림띠는 정면성을, 옥상부의 사각탑과 창 사이의 수직벽은 수직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과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 근대 의학교육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전체와 세부 구성이 치밀하고,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수준 높은 건물로서 근대건축으로서의 건축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육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녹동서원(沙也可 ,김충선장군)

1592년 4월 13일. 칠백여척의 왜 선단은 부산 앞바다를 향해 진격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선조실록에는 임란 당시 공을 세운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 중 낯선 이름들이 있었다. 사야가, 평구로, 산여문, 요질기, 사고여무.. 글자 돌고 그것은 조선이름이 아니었다. 왜군의 이름들이었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7년에 걸친 전쟁. 임진왜란. 그 승리 뒤에, 왜군과 싸웠던 왜군들이 있었다. 왜군 들어오고 (12) 1592년 4월. 조선침략을 위해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부산에 상륙한다. 사야가는 바로 그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선봉장이었다.

그는 부산 상륙 후,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내, 투항의지를 밝힌다. 임진년 사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옵니다. 이번에 일본이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며, 저를 선봉으로 삼으매, 저의 소원인 조선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생각으로 본의 아닌 선봉이 되어서 군사를 이끌고 본국, 조선에 이른 것입니다. 다만 저의 소원은 이 나라의 예의 문물과 의관풍속을 아름다이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야트막한 산줄기에 둘러싸인 시골마을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사슴이 많아 "우록동"이라 이름 붙여진 동네. 마을은 400년동안 이어온 사성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다.

김충선 묘는 일본장수인 우선봉장(右先鋒將) 사야가의 묘이다. 김충선 장군은 어릴 때부터 인륜을 중시해 왔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문호인 시바료타로가 저술한 <한나라기행>. 사야가를 소개한 이 기행집은, 임란당시 조선에 귀화한 왜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대중들에게 처음 알렸다.

모하당문집 기록을 보면, 사야가, 김충선은 조선에 투항 후, 조선군에 조총과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야가, 김충선은 조선에 귀화후, 자체적으로 조총부대를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기록도 나오고 있습니다.

경주, 울산의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그후로도 이 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 등 나라에 큰 난이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전장으로 나아가 적을 무찔렀다.

1571년 태어나 1643년 별세 후 병조판서로 추증받았으며 현종10년(1669) 묘비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사카 지로는 사야가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 <바다의 가야금>을 쓴 저자다.
사야가가 전국시대때 존재했던 일본 최강의 철포부대원 중, 한 인물이라 주장했다. 일본에는 조총을 직접 제조하고, 잘 쏘는 여러개의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 중, 최강의 철포부대는 바로 와카야마현의 '사이카'라 불리는 철포부대. 이 부대는 영주에게 예속되지 않은 독립집단 으로, 최고의 명사수들이었다. 바로 이 사이카부대에 사야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총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총도 그렇지만, 화약의 조합도 그렇습니다.그런 것들이 조선에, 전수된 것을 볼 때, 사야가는 사이카일 것입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던 마을이름을 따, 일본발음으로 "사이카"라 불렸는데 "사야가"와 발음이 흡사하다.

사이카부대의 대장 스즈키 마고이치로가 사야가라, 주장한다. 스즈키 마고이지로라는 이름이 진짠 이름인데, 밖에 나가면 전부 사이카라고 불렀습니다. 실제, 스즈키는 임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고, 이후 그의 흔적은 일본 땅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스즈키 마고이치로는 조선침략의 출병지 나고야까지 100명을 데리고 갔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겨버립니다. 마고이치로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남아있는데, 그만 홀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서남대학교의 마루야마 교수. 그는 사야가가,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장수, "하라다노부타네"라는 새학설을 발표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출정군인에 대한 일람표를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사야가가 될 수 없습니다. 전사했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 중에서 조사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니까, 사야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인물이 "하라다 노부타네"였다.진립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 출병 1년 전에 작성한 것으로, 조선침략시, 출병할장수 들의 명단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이것은 가토 기요마사의 진립서입니다. 1592년 가토 기요마사가 제2진으로 나고야성을 출발해서, 조선에 상륙하는데 그때 가토 기요마사 쪽의 군진을 나타내는 그런 자료입니다. 진립서에 쓰여져 있는 여력. 하라다 노부타네는 바로 이 여력부대에 속해 있었다. 여력에 속한 이름들은 여기서는 안쓰고 있습니다. 여력을 조사해보면, 여력의 맨 처음에 실려있는 이름이 하라다 노부타네 (사야가)입니다.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여력부대 명단. 무사들의 이름 맨 위에, 하라다 노부타네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라다 가문의 족보에도, 하라다 노부타네가 조선에 출병한 기록이 나와있는데, 출병 후, 그가 사라졌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죽었거나, 혹은 투항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하라다가 조선출병 전, 직접 작성한 자신의 부대구성원명단. 거기에, 그는 자신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의 조선출병 부대원 중, 철포부대가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투항했다면, 조총기술을 조선에 전수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하라다가문이 살았던 마에바루시. 그곳에 하라다가문이 세운 절이 남아있었다. 하라다 집안의 묘지들이 있었다. 그런데 하라다 노부타네의 묘지는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하라다가 조선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족보의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전국시대에, 하라다가문은 대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토요토미히데요시군에 의해, 정벌당하고 가토 기요마사휘하로 예속됐다. 전국통일을 꿈꾸던 히데요시가, 큐슈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하라다 가문이 희생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국통일과정에서, 하라다 뿐 아니라, 많은 반토요토미 히데요시세력을 만들었다. 반히데요시세력. 하라다가 조선에 투항할 가능성은 충분한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을 위해, 나고야성에 3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반란을 대비해, 이 곳에 전국, 영주의 아내들을 인질로 데려다 놓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도, 히데요시는 대륙정벌의 야심을 구체화시켰다. 그러나 많은 영주들과 무사들은 조선침략을 반대했다.

영주들은 히데요시로부터 명령 받은 군인들, 전쟁에 참가해야 할 사무라이들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이 가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군인들을 출전시키지 않고 성에 틀어박혀있다가 히데요시로부터 처벌받은 영주들도 있습니다. 반 히데요시 세력들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즈사키린따로(水崎林太郞)

명치(明治) 중기 애지현(愛知懸) 기부정장(岐阜町長)을 역임한 미즈사키린따로(水崎林太郞)의 묘.
수성못은 옛 둔동제,
세종조 「경상도지리지」에 나와…

수성못은 대구시민들에게 1924년 일제가 수리조합비를 거둬 들일 목적 하에 만든 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성못은 조선조부터 있어 왔던 것임을 세종조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예종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의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수성못’에 대한 최초의 문서인 세종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을 살펴보면, 대구군에는 4개의 큰 수리지(水利地)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중 둔동제(屯洞堤)라 불리는 것이 지금의 수성못이다.

4개의 수리시설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佛上堤(현 배자못, 소출 양 64결)
(2) 釜堤(현 동촌, 소출 양 52결)
(3) 聖堂堤(현 성당못, 소출 양 48결)
(4) 屯洞堤(현 수성못, 소출 양 21결)

그리고, 예종 원년(1468년), 대구군에 18개의 수리지(水利地)를 더 축조하여 총 22개가 되었다. 이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1469년에 만든「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조선조가 쌀 농사를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조조 43~47년 사이에 편찬된 읍지중에 하나인 「대구읍지」(大邱邑誌)에 ‘둔동제’가 수동(현 범물동 일대)에 있다고 나와있다. 둔동제는 둘레가 1,429척이고 수심이 7척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구읍지 번역판은 1997년 김택규·박대현 편역으로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하였다.

이후, 일제가 1924년 5월에 수성수리조합을 만들고, 수성못을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부사」에서도 수성못이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수성못에 대해 “옛 수성현 동문산리 소재, 현 달성군 수성면 상동 수성저수지”라고 서술되어 있다.

미즈사키린따로는 일제시대 대구지역 관개용수 확보를 위한 저수지를 조성하는 등 지역의 농업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한 인물로 묘소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저수지 옆에 만들어졌다.

1914년 가족과 함께 대구에 정착한 그는 농업에 종사하며 현지 농민이 가뭄과 홍수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저수지의 설계, 측량을 끝낸 후 경북도의 일본인 지사에게 직언을 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한국인을 배려하지 않은 것은 일본인의 잘못”이라고 격노하여 조선 총독과 직접 면담하고 공비 1만 2천엔(현재 10억엔 정도)을 받아 못을 조성. 관리했다.

당시의 수성평야는 현재 주택과 음식점(들안길 등) 등이 들어서고 수성못은 유원지로 조성되어 시민의 휴양지로 변모하였다.

주소 :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산 21-8 연락처 : 053)784-6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