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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겨울 韓·日歷史文化探險隊

우암2동 소막 / 구덕수원지못 / 일신여학교


우암2동 소막

문현동에서 우암로를 따라 조금가면 오른쪽은 매립지이며, 매립지에는 포항제철 부산사무소 등이 있고, 왼쪽에는 우암2동 사무소쪽으로 오르면 일제강점기시대에 전국의 소를 모아 일본으로 보내기 전에 검역을 실시하던 소막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주택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우암2동 일대가 일제시대에 전국의 소을 모아 일본으로 보내기 전에 검역을 실시하던 곳이다.

지금은 주택지로 변해 있는 모습.

우암동구시장 앞쪽에 있는 모습. 위 사진을 보면 일부 일본식 건축물의 양식을 확인 할 수 있다. 지금은 주택지로 변모하여 있다.

 

구덕수원지못

구덕운동장에서 꽃동네 마을 쪽으로 올라가면 정상 부근에서 구덕야영장이라는 표말을 볼 수 있습니다. 구덕야영장 안 쪽으로 들어가면 구덕수원지못을 볼 수있다.

일제강점기에 보수동, 충무동, 남포동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식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부산항을 출입하는 일본 배에 식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저수지 부근에는 많은 삼나무(스기목)이 아직도 많이 자생하고 있다.

구덕수원지못의 아래쪽에서 찍은 모습, 군데 군데 삼나무(스기목)이 보인다.

구덕수원지못의 수로의 모습, 많은 곳에서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구덕수원못의 옆에 있는 일제시대의 콘크리트로 추정되는 모습.

 

구 부산진일신여학교사

좌천동 일신기독병원에서 좌측으로 가면 정공단이 있고, 정공단에서 위쪽으로 오르막을 올라가면 일신여학교 건물이 보인다. 부산에는 1919년 3월 2,3일 경 기독교인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몰래 나누어졌고, 일신여학교에서는 주경애, 박시연 등의 교사와 김응수, 김반수 등 11명의 학생들이 3월 11일 오후 9시 경 기숙사를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두 시간 후 주모자 전원이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민중이 호응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의거는 부산.경남 3.1운동의 첫 봉화가 되어 그후 각지에서 잇달아 의거가 일어났다.

부산진에 있었던 사립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는 호주장로교 선교회 여자전도부가 1895년 10월 15일 좌천동 소재 한 칸의 초가에서 수학년한 3년의 소학교 과정을 설치하였다. 그 학교가 사립 부산진 일신여학교이다.

초대교장으로는 선교사인 Menzies(1895~1902)였다. 부산진에 있는 사립 일신여학교 교사는 1905년 4월 15일 준공하여 이전하였다. 건물은 2층 벽돌 서구식 서민풍의 건축양식으로 1층 40.35평, 2층 38.25평 총 76.8평이다. 정면 4각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으나, 전면에 벽돌의 장주를 2층 처마까지 계속하여 세우고 2층에는 목조의 발코니를 내고 거기에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배치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보기 보기드문 형태였다. 1층 벽체는 4군데의 창둘레의 벽돌외에는 전부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은 벽돌로 쌓았다. 선교를 위한 교육시설이란 점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1909년 8월 9일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고등과(수업연한 3년)를 병설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여성이 높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1913년 3월 고등과 제1회 졸업생(4명)을 배출하였다. 1915년 8월 7일에는 학칭개정에 의해 수업연한 3년이었던 소학교를 4년으로 하고, 고등과를 4년으로 하였다.

고등과는 1925년 6월 10일, 동래구 복천동 500번지에 신축교사(현 우성아파트)를 지어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 불리게 되었으니, 좌천동의 부산진 일신여학교 고등과는 오늘의 동래여자고등학교 전신이 된다. 1987년 1월 19일 현재의 부곡동 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