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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가을 韓·日歷史文化探險隊

상지(대신공원) / 종탑(부산세관) / 부산진매축기념비

 

상지(대신공원)

대신공원은 넓이는 209만 3819㎡에 이른다. 1900년에 일본인들이 구덕산(556m)과 엄광산(504m)의 계곡에 수원지를 만들면서 삼나무와 편백나무·벚나무 등 수목을 심고 주위를 정비하여 공원으로 꾸밀 계획이었다. 그러나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일본인 집단 거주지에 물을 공급하고, 부산항을 출입하는 일본인 배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저수지 2개를 축조하였고, 을본 소나무 스기(삼나무)을 심어서 배에서 사용하는 돗대를 생산하기 위하여, 대신공원 저수지 주변에 일본인들이 많은 나무를 심었다.

수령 70년이 넘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삼림욕하기에도 좋아 하루 4000명 이상의 시민이 찾는다. 위 사진에 보면 저수지의 축조방식이 특이하다. 수로를 보면 일부는 우리나라식이고, 일부는 일본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저수지를 축조 할 때에 많은 우리나라 사람이 일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공원의 봉우리 정상에는 옛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있다.

저수지 축조 형태를 보면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그리고 아주 정교하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수로의 모습

상수도 시설물

수로로 아주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대신공원에 있는 스기(삼나무)의 표시

 

종탑(부산세관)

부산세관 마당에는 종탑이 있다. 부산에는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22호가 없다. 제22호였던 부산세관이 지난 1979년 문화재 지정까지 해제 당하며 도시계획의 희생물로 철거됐기 때문이다..

1911년 준공된 부산세관은 러시아에서 벽돌 한 장 한 장을 종이에 싸서 배로 운반해 올 정도로 정성을 들여 지은 르네상스식 건물이었다. 붉은 벽돌로 된 골조와 녹색 다이아몬드형 슬레이트,우뚝 솟아오른 종탑은 부산의 명물이었다.

하지만 부둣길 확장 공사부지에 건물의 3/4이 포함되면서 그 영욕의 세월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종탑 부분만 신축 부산세관 앞 마당에 겨우 보존돼 있다.

 

부산진매축기념비

동부경찰서 정문 오른쪽에 한구석에 "부산진매축기념비"라 새겨진 화강암 비석이 있다. 뒷면의 비문은 시멘트로 발라 판독이 어렵지만 일본인 성명을 읽을 수 있다. 뜻있는 이가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산항의 오늘이 있기까지의 명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대륙침략의 발판으로서의 부산을 군사. 경제의 요충화하기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일합방전인 1902년에서 1908년에 이르는 기간에 대청동 일대 4만 1천평을 1906년에서 1912년까지 본역 및 세관설치공사를 완성했고, 1913년에서 1917년까지 부산진 앞바다 14만 4천여평이 매축되었다. 또한 1923년 10월 부산진 매축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수정동 및 범일동 해안 일대의 방대한 면적이 매립되었다.

이 부산진 매축기념비는 이 매립지의 완성과 함께 세워 졌던 것이다. 구부산역(중앙동)을 중심으로 한"한마당"을 만든 것을 비롯하여 동항과 남항의 매립을 완성, 오늘의 부산을 건설하는 기초가 되었다. 지금의 중앙동 거리나 남포동거리가 모두 바다였다는 것을 아는 젊은이는 드물 것이다.

옛 부산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좋은 항구를 이루고 있었으나 평지가 적어 항만 발전이 크게 저해 되고 있었으나 바다의 매립으로 시가지를 형성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부산진매축주식회사는 부산부 범일정 31번지에 소재하여 공장및 시가지건설을 위해 부산부 범일정과 동래부 서면 우단리지선을 매축지로 삼았는데 공사면적은 313,240평으로서 총공사비는 4,780,000원이었다.

본 매축공사는 부산항에서 가장큰 공사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준공일자와 공사진행에 관한 제반사항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한다. 이 회사는 일본 신호의 일본인 나까무라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회사이었다. 지금은 시멘트로 발라던 것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멘트가 떨어져나간 흔적으로 어느 정도의 글짜는 판독이 가능하다.

 

부산진 지역 매축지

부산진 지역 매축지 비석은 고관입구에 있는 공원에 있으며, 1983년 2월에 부산직할시에서 세운 것이다. 부산항은 그 수면이 확대한 데 반하여 시가지의 면적이 협소하였으므로 이를 타게하기 위하여 부산진방면의 해면을 매축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 방면의 매축을 기도한 때는 이미 한일합방이후 이므로 당연히 일본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는데, 특히 일본 나고야 방면의 일본 자본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조선기업주식회사(일본인회사)가 항구의 북부인 구관에서 부산진에 이르는 해면 400,000평을 400,000원에 매수하여 매축면허를 조선총독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처음 전기의 해면은 400,000평이었는데 실제로 측량한 결과 41,859평 84가 감소된 358,150평 16이었다. 이리하여 기 면적을 1913년 6월에 제1차공사로서 144,188평의 매립공사에 착수하여 1917년에는 그 공사의 대체적인 준공을 보았다. 제2기, 제3기 공사구역은 당 공사의 형편으로 그 시공을 중지하여 매축권을 포기한 바 있었다. 그후에 창립된 부산진매축주식회사는 상기 조선기업주식회사의 제2기, 제3기에 해당하는 구역과 우단리 지선을 포함한 305.690평(일설은 313,240평)의 매립면허를 받아 1923년 11월 1일(일설은 동년 8월)에 작수하였다.

전기 일본인회사 부산진매축주식회사는 일본 신호 나까무라란 자가 중심이 되어 매축면적 313,240평 중 약 반에 해당하는 162,050평은 이미 준공을 보았고, 남은 151,190평은 1938년 8월에 준공할 예정이었다. 이 지역은 공장지대로서 가장 유망시 되어 철도 연락도 편리할 뿐 아니라 광대한땅이었다. 당 회사는 부산부 범일정 31번지에 소재하여 공장및 시가지 건설을 위해 부산부 범일정과 동래부 서면 우단리 지선을 매축지로 삼았는데, 공사면적은 전기와 같이 313,240평으로서 그 중 제1매축지는 면적이 162,050평, 제2매축지는 151,190평이었다.

부산진 지역 매축지비석은 1983년 2월에 부산직할시에서 고관입구에 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