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月

2月

3月

4月

5月

6月

7月

8月

9月

10月

11月

12月

HOME

2003年 여름 韓·日歷史文化探險隊

"정란각" / 요정 "경판정" / 남항매축기념비


"정란각"

『정란각』은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1-1010 위치하며, 일제시대 목조 건물인『정란각』은 일제시대 고위 관료의 관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정란각은 고풍스런 옛 가옥의 정취를 간직한 채 일식전문 요리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란각에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Ⅰ』영화 촬영장으로 활용되어 더욱 유명하다.

『정란각』의 입구의 전경

『정란각』의 전경.

『정란각』은 요정으로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방문하고 있다. 051-467-1421

 

 

요정 "경판정"

용두산 공원 남쪽 광복동 거리에서 돌계단을 오르는 도중 오른쪽에 있는 낡아 빠진 나지막한 일본식 2층집 한 채가 끼어 있다. 얼른 알아 보기 힘든 이 낡은 집은 이웃 건물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을씨년스럽게 고색창연한 채로 남아 있다. 이 일본식 집은 광복동 금싸라기 땅에서 딱 하나 남아 있는 일본식 집으로서 1백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지켜 버티고 있는 보기 드문 집이다.

오늘에는 비록 초라하다 못해 음침스러운 이 집도 부산항 개항 이후 부산에 찾아 든 어느 일본 사람이 별다른 이 자리에 집을 지어 놓았을 때만 하더라도 호사스러운 모습으로 선보였을 것임은 틀림 없었을 것이다. 이 일본식 집이야말로 지분 냄새가 물씬거리는 일본 기생들이 돈냥깨나 있는 술꾼들을 나긋나긋하게 시중들고 있던일본 요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 요정은 "경판정"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던 요리집이었다. 이 일본 요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름이 남아 있게 된 것은 이곳이 부산항 개항 이후 일본사람들만 드나들었던 것이 아니라 러시아 해군 장병들까지 뒤섞여 드나들어 국제적인 요리집이 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판정"은 그 무렵 일본과 러시아간 감정 대립까지 빚었던 무대가 됐었기 때문에 이름난 일본 요정으로서 이야깃거리가 전해오고 있다.

1899년 7월 11일 한여름날 하오 4시께 부산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군함 카이다마쯔크호에서 내린 해군 장교 한 사람이 "경판정"에서 일본 기생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진 러시아 해군 장교는 일본 기생이 고분고분하지 않는다며 그녀를 후려 갈겼고 그를 말리던 종업원 한 사람도 러시아 해군 장교에게 얻어 받았다. 러시아 해군 장교가 하도 사납게 구는 바람에 다른 일본 사람들은 아무도 그이상 더 말리지 못했다. 러시아 해군 장교는 술에 취한 나머지 군복의 휘장과 모자를 "경판정"에 떨어뜨려 놓은 채로 군함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술집에서라면 어디서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조그만 일이 그 이튿날 일본 전국 각지 신문에 엄청나게 침소봉대되어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의 내용 기사가 모든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이것이 빌미가 되어 러시아. 일본간 국제 문제로 번져 나갔다. 이런 신문 보도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카이다마쯔크호 함장 요오레쯔는 부산주재 일본 영사관쪽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한편으로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 웨버에게 얼토당토 않은 악의에 찬 신문 보도라고 서면으로 보고했다.
이 무렵 러시아는 부산 복병산을 러시아 조차지로 얻어 내려다가 실패했었다. 일본쪽은 자신들의 전관 거류 구역 바로 가까이에 복병산이 있는 데다가 여기에는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는 까닭에 러시아에게 이 땅을 조차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갖 외교 수단을 다해서 러시아의 조차지 임대 공작을 훼방 놓은 끝에 러시아 쪽보다 먼저 1892년 우리 나라 정부와 "복병산 조차에서 관한 협정"을 맺어 버렸다.
러시아 해군 고리우바키스 대위가 "경판정"에서 어줍잖은 일을 저지른 것이 일본 신문에 보도됐던 것은 러시아와 일본이 복병산 조차 문제로 날카로운 외교 신경전을 벌였던 끝의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쪽에서는 이 토막극을 의도적으로 과장 보도하게 됐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러시아~일본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은 더욱 날카롭게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쪽에서 요오레쯔 함장이 나서고 일본쪽에서는 부산주재 영사관 외무서기가 나서서 조사해 본 결과 "경판정" 일본 기생과 종업원이 약을 칠하면 나을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상처로 밝혀져 떠들썩 했던 세상 소문과는 달리 조용히 가라앉아 버렸다.

"경판정" 사건이 일어난 뒤 고작 넉달이 지난 1899년 11월 5일 하오 3시께 일이었다. 오늘의 광복동 거리에 있던 양식당 "송천정"에 러시아 군한 카이다마쯔크호의 수병(守兵) 18명이 찾아들어 브랜디 18병을 마신 뒤 음식값 18원 16전을 치르고 이 술집을 나섰다.
"송천정"을 나서자마자 그 가운데 러시아 수병 두 사람이 크게 입씨름을 벌이던 끝에 18명의 수병들이 두 패로 갈리어 주먹 다짐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저들끼리 치고받는 싸움을 지켜보던 일본 사람들에게 러시아 수병들이 생트집을 잡고 주먹을 휘둘러댔다. 이대 일본 사람 한 사람이 느닷없이 덮쳐드는 러시아 수병을 잽싸게 피하면서 땅바닥에 넘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다른 러시아 수병들이 몰려 그 일본 사람을 붙들어 몰매를 퍼부었다. 이 일본 사람은 다리를 절면서 가까이 있는 일본 영사관 구내 일본 경찰서로 뛰어 들어가 일의 자초지종을 알렸다.
그 사이에 러시아 수병들은 카이다마쯔크호로 철수해 들어가다가 부산세관 창고에서 하역 작업을 하고 있던 다른 일본인 인부들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이 바람에 한 사람이 돌에 맞아 머리에 두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이 사람도 겁에 질려 일본 영사관 구내 일본 경찰서로 달려 들어 사정을 알렸다.
이런 사고 연락을 받은 일본 경찰서에서는 경찰관 세 사람을 현장에 서둘러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 수병들은 이때 벌써 보트를 타고 군함으로 저어 나가고 있었다.그런데 수병 한 사람이 미처 보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바닷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자 일본 경찰관들은 그 러시아 수병을 건져 내서 일본 영사관으로 데리고 가 보호해 두었다. 얼마 뒤 러시아 군함 카이다마쯔크호에서 장교 한 사람이 일본 영사관으로 찾아와서 러시아 수병과 수병 모자 셋을 인수해 갔다. 이때 일본 영사관쪽에서는 카이다마쯔크호 해군 사관에게 폭행 수병들에 대하여 엄중하게 처벌을 해 줄 것을 요구했었다.
그뒤 11월 8일 카이다마쯔크호는 러시아 조차지(租借地)가 있는 마산항을 향해 떠나갔다. 그리고 같은 달인 11월 16일 다른 러시아 군함이 부산항에 입항하더니 러시아 군의관 한 사람이 일본 영사관으로 찾아 와 상처 입은 두 일본 사람을 진단하고 돌아갔다.
이때도 일본 영사관쪽에서는 엄중하게 항의했다. 그뒤 닷새만인 11월 21일 하오에 문제의 카이다마쯔크호 함장 요오레쯔가 직접 일본 영사를 찾아와서 관례적인 제스츄어 같은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일본 영사관쪽에서는 자뭇 분통을 터뜨렸고, 이때부터 러시아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감정은 나빠져만 갔다.
그 무렵 러시아 군함은 미산항 러시아 조차지로 가던 도중에 부산항에 들렸다가 며칠씩 묵고 가곤 했었다. 그런 러시아 군함이 오륙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려오면 일본 사람들은 그네들이 살고 있던 광복동~동광동 거리의 상점 문을 꽁꽁 닫아 버렸다.
그런데도 러시아 수병들은 일본 술집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서 위크시든 맥주든 있는대로 낚아 채서 병목을 돌에 치고 깨든가 손가락에 낀 굵은 반지로 치고 깨서 병째로 마셔대는 바람에 깨어진 날카로운 병목에 입을 다쳐 피를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마시고 난 병을 일본인 상점에 냅다 던지는 바람에 다치는 사람도 더러 생겼었다. 이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러시아 수병들을 "로스케"라고 부르면 겁을 집어 먹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라사 병정"이라고 부르며 겁을 냈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요정인 "경판정"은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적 분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지금은 화재로 인하여 대부분이 흉물스럽게 되어있고, 앞 부분에는 한참 새로운 공사가 진행 중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위 사진에 보이는 지주대만이 남아 있다.

 

남항매축기념비

부산항 북항 매축 1~2기 공사가 1911년에 마무리되고 그 이듬해인 1912년 6월 15일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비롯한 3천t급 대형 선박이 계선(繫船)할 수 있는 부두가 개장되자 이 두부는 부산항 제1잔교(第一棧橋)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오늘의 국제 페리 부두인 이 제1잔교는 그 서쪽 곁에 있던 부산역 철도선(鐵道線)이 이 잔교까지 끌어 들여짐으로써 일본 철도쪽에서 관부연락선에 실려 온 객차(客車)가 부산항에서 바로 경부선(京釜線) 철도로 연결될 수 있는 시설과 장치까지 갖추어졌다. 이와 때를 맞추어 부산항은 우리 나라 관문(關門)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대륙~유럽으로까지 통하는 극동(極東) 아시아의 관문으로까지 크게 발돋움을 하게 됐다. 그즈음에 압록강 철교(鴨綠江鐵橋)가 개통됨으로써 경부선~만주 철도(滿洲鐵道)~시베리아 대륙 횡단 철도를 경유하는 유럽~아시아 사이의 철도선이 이어졌고, 따라서 부산은 유라시아 대륙 횡단 철도의 아시아쪽 기점(起點)이 됐던 것이다. 오늘의 중구 지역의 핵심이 돼 있던 부산항은 그 뒤로도 물동량(物動量)이 해가 다르게 자꾸만 늘어나자 제1잔교 하나만으로는 늘어나는 물동량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착수됐던 것이 부산항 축항 대역사(釜山港築港大役事)였다. 항만 시설 확충 공사까지 겸했던 이 부산항 축항 공사는 제1기(1910~1918년)와 제2기(1919~1928년)로 나누어져 실시되었다.

1925년 5월 부산 남항 실지(實地) 현장 조사 착수
1926년 남항 건설 설계 완성
1926년 10월 남항 건설 공사 허가 신청 제출
1928년 2월 9일 남항 건설 공사 허가 신청 인가(認可)
1928년 부산 축항 합자회사, 자본금 5백만원으로 설립되고 그 대표에 이케다(池田佐忠)가 취임.
1928년 11월 9일 공사 실시 인가(방파제 및 보수천 하구~남포동 해안 수면 4만 4천8백60평 매축)
1930년 2월 남항 방파제, 남포동 해안 매축 착수
1931년 5월 남항 방파제 준공
남포동 해안 매축 준공(제1기 매축 공사에 해당)
1934년 2월 대정공원(大正公園 : 오늘의 충무 국민학교 자리)~완월동 일대
1935년 2월 수면(水面) 3만 4천평 매축 공사에 착수(제2기 매축공사에 해당)
1938년 2월 제2기 남항 매축 공사 준공

이상의 부산 남항 건설에 따른 남항 지역 매축으로 확장된 토지 가운데 오늘의 중구 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제1기 매축 공사 마무리에 따라 생긴 땅 곧 보수천 하구~남포동 해안 일대의 4만4천8백60평이었다. 그중에서 도로 등을 제외한 건축용 부지(敷地)는 3만8천98평이었다. 이와 같은 건축용 부지는 매축 공사가 준공되자마자 1평당 62원으로 거래됐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남포동 자갈치시장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남항은 우리 나라 어업 전진 기지로서의 어항(漁港)이자 연안무역항(沿岸貿易港)으로서 산뜻한 모습을 드러내게 됐던 것이다. 그런 기능을 가진 남항이 등장하자 부산항 북항은 이름 그대로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전담해 나가게 됐고 부산항이 남북항으로 저마다의 기능을 특성적으로 살려 나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남항매축기념비(대신공원 소재)는 이케다라는 일본인이 충무동 로타리에 세웠는데, 해방후 모 단체가 비문 위에 "충무공 이순신 영모비"라는 비문으로 고쳐 새겨 전혀 다른 비석으로 변했다. 위의 사진에도 보면 글짜를 확인 할 수 없게 삭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