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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年 10月 韓·日歷史文化探險隊

부산유치원 / 영도대교 / 구포다리

부산유치원

유치원 (幼稚園, Kindergarten). infant school이라고도 함. (독일어 Kindergarten은 '어린이의 정원'이라는 뜻). 4~5세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

1897년 3월(명치 30년)에 설립된 용두산공원 주차장에서 부산호텔 방향으로 가는 길에 보면, 옛날 왜관의 석벽이 있는 부분에 보면 위쪽에 일본인의 고급 관료의 자제나 부자집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인에 의하여 "부산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의 유치원 교육은 크게 두 가지 영향을 받고 발전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인에 의한 유아교육의 영향과 미국 선교사에 의한 영향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프뢰벨의 사상과 기독교 사상이 주류인데, 이러한 사상은 광복 전까지 우리나라 유아교육의 철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의 유치원에 관한 최초의 법령은 "유치원 규정"인데 이 유치원 규정은 총 13조로 되어있다. 이 중 교육과정과 관련된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법령은 비록 일본인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령이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에 관한 법령이며 광복 후 교육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유치원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 시대의 유치원 교육내용은 유치원 규정에서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유희, 창가, 담화 및 수기의 과목들이었다.

유희는 주로 곡에 맞추어 하였으며 심정을 쾌활하게 하고 신체를 건전하게 함이 목적이고, 창가는 쉬운 곡을 부르게 하여 발성기, 호흡기, 청각기를 운동시켜 그 반응을 돕고 덕성을 함양함이 목적이었다. 담화는 흥미있는 사실이나 우화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덕성을 함양시켜 관찰력을 기르고 발음을 정확하게 흥미 목적이었고, 수기는 은물을 사용해서 손과 눈의 활동을 연습시켜 그 발달을 도모함이 목적이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석벽은 구 왜관의 석벽으로 도로의 확장 공사로 인하여 소실 될 뻔하였지만, 현재에는 보존이 되어 있어며, 석벽 위에 보이는 건물이 일본인에 의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인 부산유치원이다.

 

영도대교

부산시민들에게 영도다리로 더 잘 알려진 영도대교(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는 부산 본토와 유인도인 영도 사이를 도선을 이용하여 왕래하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제시대인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부산 최초의 연육교이다. 정식 명칭이 당시 부산대교이던 이 다리의 길이는 214.63m, 폭은 18m, 교량의 면적은 3,948평방미터, 도개면적은 1,044평방미터이며, 또한 도개속도는 저속일 때 4분, 고속일 때 1분 30초, 도개동력으로는 22마력이다. 그 중 부산 내륙측은 31.30cm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을 가능하도록 건설되었으며, 그 밖의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항교로 하였다. 그리고 항교 아래로 만조시에는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교량 밑을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화폐로 총 공사비 70만 8천원이 투입되었다.

이 대교 가설공사는 당시 매우 어려운 토목공사로서 현재 영선초등학교와 해동고등학교 자리의 산을 깎아 영도대교 호안 매립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비명에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다리 자체공사 때에는 희생자가 속출하여 밤이되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1934년 11월에 개통된 이 다리는 하루에 여섯 번씩 도개 부분이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다리로서 개통식날 신기한 이 도개식 다리를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롯한 인근 김해. 밀양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명이고, 영도의 인구가 5만여명인 점을 생각하면 이날 모인 인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과연 이 대교가 들어올려질 수 있는냐로 신문에까지 여론화되었던 움직이는 "마법의 다리"는 하루 6번씩 하늘로 치솟으면서 영도발전을 재촉했으나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애환을 심어 주었던 다리로 기억되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던 한인들이 이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하기도 했고, 8.15광복과 6.25전쟁 때에는 생활고에 지친 피난민들이 한 많은 인생을 마치기도 했다. 특히 이북에서 피난온 당시 피난민들은 이 다리 난간 위에 비친 초생달을 보며 하염없이 망향을 달랬고, 이때 " 굳세어라 금순아" 라는 대중가요가 유행, 임시수도 부산시민의 심금을 울린바 있다. 이곳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자 " 잠깐만 " 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 있었고 경찰관이 배치되기도 했다.

일제의 학정과 6.25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본 영도대교는 전설 같은 옛이야기만 남기고 지난 1966년 9월 1일 하늘로 치솟는 도개식의 다리가 폭주하는 차량으로 기 기능이 멈추자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이로부터 꼭 10년 뒤인 지난 1976년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1980년 1월 30일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자 이 다리는 부산본토와 영도를 잇는 유일한 연육교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명칭도 영도대교로 바뀌어 버렸다. 영도대교는 보존이냐 철거냐의 기로에 서있다. 옛 부산시청 부지에 롯데월드 신축과 함께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재건설을 하자는 관청과 역사의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는 시민, 시민단체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태이다.

 

구포다리

이 다리는 일제시대인 1930년 9월 13일 착공되어, 1932년 3월 7일 준공되었으며, 길이 1060m, 폭 8.4m(중앙차도 5.4m, 좌우도로 각 1.5m)의 게루바닥판항교로 교각이 56개이다.

강서구 대저동과 북구 구포동을 잇는 다리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므로[낙동장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공사 총인원은 7,760명, 공사비 70만원(정부보조 40만원, 지방비 19만원, 지방지원 11만원)이 소요되었다.

이 다리는 건설하기까지 구포와 대저 사이는 나룻배로 왕래하였다. 사람은 물론 화물도 나룻배로 건넜으니 그 불편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배를 기다리는 시간과 건너는 시간이 매우 많이 소비되었으며 홍수로 물이 불어나면 나룻배의 운항은 중지되어냐 했다.

이 다리가 가설된 이후의 구포는 상업경기가 실질적으로 다소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경남지방과 경부선을 통한 내륙지방과 연결하는 교통요지를 이루어 새로운 면모로 비뀌었다. 지금은 건설 당시 동양 또는 국내에서 제일 긴 다리라던 [제일]이란 칭호도 사라지고 이 다리의 상.하류에 계속하여 교량들이 가설됨에 따라 그 기능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 동안 부산과 경남을 잇는 대동맥으로 산업.경제.문화.정치의 교량역할을 햐왔으며 6.25전쟁 때에는 전쟁물자 수송에 큰 몫을 해낸 귀중한 것으로 낙동강과 더불어 수난의 역사와 함께한 역사의 현장이다. 1997년 12월 첨단공법을 이용한 구포대교의 준공으로 구포다리는 노후화가 지속되어 붕괴의 우려로 차량통제를 하고 있다. 현재에는 일방통행으로 승용차만이 지나갈 수 있다.